玉匠 장주원

장주원展 / JANGJUWON / 張周元 / craft   2008_1209 ▶ 2009_02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_2008_1209_화요일_02: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광주시립미술관 GWANGJ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북구 박물관로 48 본관 2층 Tel. +82.62.510.0700 artmuse.gwangju.go.kr

玉匠 장주원, 그의 승화된 玉예술을 만나다옥장 장주원의 지위 ● 옥장 장주원은 우리나라 옥공예의 재현과 맥을 잇기 위해 지난 50여 년간 매진하였으며 국내외 전문인들로부터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세기의 장인으로서 우리 전통의 전승과 계승 발전, 승화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한국의 옥공예는 옥 자체 가공의 어려움과 사회적 생활환경의 불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인들에게 오랜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환영받기 어려웠다. 이런 까닭으로 옥은 공예품보다는 노리개, 비녀, 가락지, 옥패와 같은 장신구류의 소품 제작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주원은 전통 옥공예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오랜 끈기와 인내로 전통 옥공예의 맥을 잇고 재현, 창조의 길에 노력하고 있다.

장주원_녹옥 사귀 해태 향로_綠玉 四句 海苔 香爐_47×50×50cm
장주원_해태 자연석 이중 연결고리_獬豸 自然石 二重 連結

성장, 옥과의 인연 ● 장주원은 193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한학에 능통하였으며, 한의로서 전라남도한의사협회 회장, 유산향교의 전교였으며 유산시사회장까지 역임하였다. 부친 장중현(張重絃)은 목포 영학교(永學校) 시절, 당시 금은세공으로 유명한 금은방에서 금은세공기술을 배우게 되어, 좀더 고급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일본 오사까 금속공예 전문점인 춘정정옥(春精町屋)에 들어가 금은세공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1936년 일시 귀국해 결혼하고 이듬해인 1937년 장주원을 낳게 되었다. 이후 그의 부친은 1946년 목포에 자립하여 금은세공업에 전념하였고, 또한 장주원의 숙부인 장보현(張補絃)도 장주원의 부친 밑에서 금은세공을 익혔으며, 장주원의 고모의 아들인 정재석(丁在錫)도 같은 업종을 경영하였다. ● 이와 같이 금은세공가로 구성되는 장씨 가계의 환경 속에서 자란 장주원은 자연히 가업의 기능에 일찍이 접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부친 밑에서 부친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보석류의 가공에 관심을 갖고 배우게 된 것이다. 장주원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적대와 미술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고등학교 때는 관현악을 하면서 미술과 공작활동에 주목을 받았었다. 특히 모교인 문태고등학교의 모표(帽標)는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디자인한 것이 당선된 것이라 하니, 그의 솜씨는 어릴 때부터 특출 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친의 사업장에서 자연스럽게 종사하게 된 것이다. ● 그렇지만 그에게도 방황의 시간은 있었다. 19세의 나이에 부모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어, 그 압박으로 부친의 사업장에서 떠나 유랑하게 되었다. 목포를 떠나 무작정 상경하여 목조각작업소, 초상화교습소, 악단단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22세 되던 해 1959년 서울 종로의 한 금은세공장에 들어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금은세공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27세가 되던 해 1964년에는 보석전문공예사로 옮겨 옥공예를 주로 다루게 되어 새로운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이렇듯이 어릴 적부터 익혀왔던 부친의 금은세공의 기술이 기초가 되어 고도의 새로운 기술과 기량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 1965년 돌연히 그는 고향 목포로 귀향하여 옥공예공방을 설립하여 행상을 상대로 옥공예품들을 생산하여 판매하다가, 규모를 늘린 사업시설의 경영에 실패, 41세의 나이로 다시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세를 들어 조그만 공방을 차리고 옥공예 제품을 수선하며 한편으로는 창의적인 기술개발을 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1980년 다시 목포로 귀향하여 죽교동에 공방을 열어, 대작(大作)과 창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들로 각종 공예경진대회에 출품하여 각종 상들을 수상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옥장인 보유자 16호, 1996년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100호 옥장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장주원_백옥 봉황 연 향로_白玉 鳳凰 蓮 香爐_32×18.8×18.8cm
장주원_청옥 호리박 주전자 세트_靑玉 葫蘆 酒煎子_13.3×7.5×4cm

한국의 옥 ● 우리나라에서는 석기시대부터 옥이 사용되어져 왔으며 각종 고분에서 출토된 주옥(珠玉)류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특히 삼국시대에는 옥이 매우 애용되었다. 그 형태는 곡옥(曲玉), 관옥(管玉), 구옥(球玉)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조각된 옥제 장식품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공장(京工匠)내 상의원(尙衣院)에 속해 있는 장인의 수가 10명으로 전국적으로 적지 않는 옥장(玉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옥은 우리의 오랜 역사를 통해 왕실 및 귀족들의 장식품으로 애용되어 왔던 것이다. 부드러운 옥의 성질은 바로 끈기와 온유, 은은함, 인내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아 애용되어 왔던 것으로 평가된다. ● 이처럼 옥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품성에 견주었으며, 때로는 영험이 깃든 약효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서양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가장 값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비해, 우리 동양 사람들은 옥을 가장 즐기는 보배 중의 하나로 여겼다. 여기서 서양인과 동양인의 미적인 감각의 차이가 나타나는데, 즉 다이아몬드는 광택을 내품는 적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빛을 반사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서양인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옥은 빛을 내부로 향하여 머금는 빛의 흡수로 동양인의 미덕인 겸손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옥은 한국 고유의 보석으로, 조선시대 이후 양반집에서 고부간, 모녀간에 옥장신구로 전해 내려왔다.

장주원_황옥 원형 관통 주전자 세트_黃玉 圓形 貫通 酒煎子_12.1×19×5.5cm
장주원_녹옥 봉황 연 향로_綠玉 鳳凰 蓮 香爐_35×31×22.5cm

옥공예를 넘어선 옥예술 ● 19세기 들어와 산업사회가 시작되자 공예분야는 공업에 밀려 손으로 만든 수공예품이 기계제품에 밀리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전통 공예관을 지난 소위 "쟁이"들은 그들의 의지로 한 점의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여 왔다. ● 옥장 장주원도 재래적 과정을 고수하며 지금에 이르러 그의 절묘한 기술로서 역사에 남을 만한 걸작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옥제작 공정은 채석, 디자인, 절단, 성형, 구멍뚫기, 홈파기 등의 세부조각, 광택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거기에는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채석 및 밑그림 그리기 등의 초기단계부터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섬세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과정을 위해 고도의 예술성을 필요로 한다. 장주원의 작품들은 절묘한 기술이라는 측면을 한 단계 뛰어 넘어 인간능력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예술의 탄생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작품들은 기능성을 강조한 공예에서 고리를 달거나 장식을 가미한 현대성을 창조해, 예술로 승화시켰다. 단순히 전통과 기술의 전승만으로는 가히 예술이라 일컫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8천년 옥의 종주국이라고 자칭하는 중국에서 조차도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옥작품제작의 환주기법, 이중연결고리 등의 한 차원 높인 기법은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20여년이 걸리기도 하는 그의 끈기와 인내의 장인정신은 한국인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에 충분하다. 옥의 장식성과 공예품이라는 틀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까지 올린 장주원의 독보적인 창조성과 예술성은 우리 한국예술의 자부심인 것이다. ■ 김민경

Vol.20081215g | 장주원展 / JANGJUWON / 張周元 / craft